조선초기 「경제육전」과 그 위의 법령을 종합하여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만들어 졌으며 조선의 통치체계는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 은 총 3책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1: 이전(吏典)> · <권2: 호전(戶典)> · <권3: 예전(禮典)> · <권4: 병전(兵典)> · <권5: 형전(刑典)> ·
<권6 : 공전(工典)>의 순서로 되어있다.
억울한 사정을 소원하려는 사람은 수도에서는 주관하는 관리에게 제기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제기한다.
그래도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사헌부에 제기하며, 또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있다. 대체로 임금에게 올리는 말은 당직관리가 사헌부의 퇴장을 상고해 본 다음에 받아서 임금에게 보고하며 만일 의금부나 사헌부에서 심리할 만한 것이면 애초에 퇴장을 상고하지 않는다.
글을 올리면 임금의 비준을 받아 내려보낸 지 5일 이내에 회답보고를 올리며 만일 기한이 지나면 즉시 회답보고를 올리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적어서 보고한다]
종묘사직과 관련되는 문제이거나 비법적인 살인사건 이외에는 이전이나 하인이 자기 관청의 관리를 고발하는 경우라든가, 품관이나 아전 또는 백성으로서 자기도의 관찰사 고을원을 고발하는 경우에는 모두 받아주지 않은 채 장형 100대와 도형 3년에 처한다.
[품관이나 아전 또는 백성이면 그 시골에서 내쫓는다]
몰래 다른 사람을 부추겨 고소장을 내게 한 자도 죄가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고소할 경우에는 모두 받아 심리해 주며 허위 고발하는 자는
장형 100대와 유형 3천리에 처한다.
[품관이나 아전 또는 백성이면 역시 그 시골에서 내쫓는다.]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살 이상이며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어 벼슬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본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몸을 의지하는 궤와 지팡이(几杖)를 준다.
당하관으로서 벼슬을 바친 사람과 공신(功臣)의 부모 · 아내 및 당상관의 아내로서 70살 이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본조 또는 본 고을에서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준다.
관리 집안의 딸로서 30살이 가깝도록 생활이 곤란하여 시집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본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적당히 혼인비용을 보내준다. [그 집안이 그다지 빈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30살이 넘도록 시집보내지 않고 있을 경우에는 가장을 엄중히 처벌한다] 친족은 없이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지 못해서 빌어먹으며 다니는 사람들과 돌봐줄 사람이 없는 늙은이에게는 적당히 옷과 먹을 것(依科)을 내 준다.
집을 잃은 어린아이는 한성부(漢城府) 또는 그 당해 고을에서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맡기되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보내준다. [10살이 넘도록 돌려달라고 신고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양육한 사람이 부리는 것을 허락한다]
앓고 있는 사람이 5부에 신고하면 인차 월령의(月令醫)를 보내어 치료해주며 가난하여 약을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관청에서 약을 주고 본조에 보고한다.
[지방이면 본 고을에서 의원(醫員)과 약을 보장해 준다. / 대개 무당(巫覡)으로 말한다면 수도에서는 본조에서 대장에 올려놓고 활인서(活人署)로 나누어서 소속시키고 지방이면 본 고을에서 대장에 올려 놓고 환자치료에 종사하게 한다]
의금부(義禁府) · 성균관(成均館) · 전옥서(典獄署)에서는 월령의(月令醫) 1명을 정하여 놓고서 병이 있는 생도들과 죄수들을 치료하도록 한다.
앓고 있는 사람이 긴급히 의원(醫員)에게 구원을 청하면 즉시 가서 치료해야 하며 즉시 가서 치료하지 않을 경우에는 환자의 집에서 신고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한다.
월말마다 본조에서는 환자를 치료한 의원(醫員)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기록하였다가 업적평정에 참고로 삼게 한다.
임금의 집안 사람이나 2품 이상의 관리가 병이 위급해서 의약관계 관청(灌何)에는 없는 약을 청구하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께 보고하여 보내준다.
온천이 있는 곳의 고을원은 성실한 사람을 선정하여 건물을 수리하고 환자를 구호하게 한다.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과 명(明)나라 사신이 오고 갈 때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는 의생(醫生) 1명을 정해 놓고 일행 중 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하게 하여 내버려두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만일 사망자가 있게 되면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줄 것이다.
* 출처 : 윤일국 옮김, 『신편 경국대전』, 서신원, 1998
1895년(고종32년) 1월 7일 고종은 세자 및 종친, 신료를 이끌고 종묘에서 '조선 독립'의 서고문을 고한 뒤 홍범14조를 내외에 알렸다.
홍범14조는 근대화 개혁을 위해 제정된 정치의 기본강령으로서 갑오개혁의 정책방향을 밝힌 요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홍범14조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홍범은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 편에 나오는 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규범" 이란 뜻이다.
* 이미지 출처 : 고종태황제실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이미지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는 그 이념적 기초로서 3·1독립선언서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4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신익회, 조소항 등 각 지방 출신의 대표자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등이 선출되었다. 여기에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 데 이어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을 심의 · 통과시켰다.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 4. 11.)이후 대한민국 임시헌법 (1919. 9. 11.), 대한민국임시헌법 (1925. 4. 7.), 대한민국 임시약헌(1927. 3. 5.),
대한민국임시약헌(1940. 10. 9.), 대한민국 건국강령 (1941. 11. 28.),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4. 22.)으로 상당 부분 수정을 반복하였다.
이 원고는 여러 군데 삭제하고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제헌헌법」 제정 시
기초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고심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조선은 민주 공화국이다' 로 시작되는 육필 원고는 「제헌헌법 」 전문 외에 총강, 인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 국회 정부 등에
10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원본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이미지 출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유진오는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 행정법, 국제공법 등을 강의해 우리나라 유일의 공법학 교수로서 활동하였고, 이러한 경력이 그를 해방 후 유일한 헌법학자로 알려지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좌익, 우익, 임정계열 나아가 미군정 등 모든 정파가 유진오에게 헌법초안을 의뢰하였다.
유진오가 구상한 신행 대한민국의 기본이념은 좌우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 것으로 그는 자유 평등 사상으로서 자유주의 이념과 경제 균등의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다함께 포용하려고 하였다.
* 출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헌헌법 (1948년) 이후 대한민국 헌법은 모두 9번의 개정을 거쳤다.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은 1948년 유진오가 만든 헌법초안의 원안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 방법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를 채택했다. 이후 1952년 발췌개헌으로 일컬어지는 1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1954년에는 사사오입개헌으로 불리는 2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초대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두 차례의 개헌이었다. 4·19 혁명 직후
1960년 6월 제정한 제 2공화국 헌법(3차 개정)은 내각책임제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5·16 군사정변으로 탄생한 제 3공화국 헌법 (5차개정)은 다시 대통령제로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1969년 6차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이 가능한 내용을 담았다. 1979년 12·12 사태로 등장한 제5공화국은 1980년 8차 개헌을 통해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도입했다. 이후 1987년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기본으로 하는 9차 개정 헌법이 탄생했다. 이때 탄생한 헌법이 바로 현행 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