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5일 헌법재판소가 출범하였으나
당시에는 창설기관으로서 조직구성만 되었을 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독립청사를 바로 마련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서울 중구 정동 15의 5 소재 정동빌딩 내 사무실(정동회관 16층 211평과 추가임차 18층 66평, 총 약 240평)을
청사로 사용하였다.
정동회관이라고도 불리는 정동청사는 구 헌법위원회가 1978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청사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계속 임차·사용하여 왔던 곳이다.
구 헌법위원회와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실질적인 헌법재판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협소한
정동청사만으로는 헌법재판소 본연의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기가 곤란하였다.
이에 우선 서울 중구 을지로 5가 40의 3에 소재한 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건물을 서울시로부터
대여 받아 이를 청사로 사용하기로 하고 개축작업을 하여 동 학교건물을 헌법재판소 용도에 맞추어
본관, 별관, 신관으로 사용하였다.
을지로청사는 건물 자체는 비좁았지만 붉은색 벽돌 건물로서 청사 내부는 조용하고 넓은 정원이
있었으며 본관 전면에 조경수, 후면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목가적인 운치가 있었다.
매일 낮 12시 30분경이면 어김없이 청사 내를 산책하는 초대 헌법재판소장 조규광의 모습은
목가적인 것과 규율적인 것의 조화를 보여주는 듯하였다.
을지로청사는 1910년대에 건립된 데다가 본관과 별관 그리고 신관으로 건물이 나뉘어져 있었고
심판정도 따로 떨어져 있는 등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곳이어서,
헌법재판소의 위상에 걸맞고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청사를 건립하였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15(재동 83번지) 일대에 있는 16,809㎡의 대지 위에 건축면적 3,539㎡, 연면적 19,270㎡
에 달하는 지하 1층, 지상 5층의 청사를 신축, 1993년 6월 1일 준공함으로써 비로소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역할에 맞는 독립된 청사를 갖게 되었다.
또한, 도서관 이전과 사무실 확충을 위해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7,600㎡ 규모의 별관을 2020년 4월 4일
준공하여 6월 22일 개관하였다.
재동청사의 부지는 구한말 개화파 공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선생의 저택이 있었고,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Allen)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혜원(廣惠院, 1885-1887)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그 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1910-1945, 구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창덕여자고등학교(1949-1989, 구 서울제3여자중학교, 창덕여자중학교)가 위치하여 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교육의 요람이었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또 부지 내에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희귀수인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백송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대심판정은 104석, 소심판정은 40석 규모이고, 대강당은 154석 규모로 국제회의나 공법·헌법관계 회의 등을 비롯한 내 · 외부의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헌법재판소 청사 부지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 개화파의 산실 역할을 하였던 박규수, 홍역식의 집과 1880년대 전반 개화의 중추기관인 외와문(현 외교통상부)이 있던 자리로 당시 급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위치했던 곳이다.
생애
본관 반남(潘南). 호 환재(齋) · 환재거사(齋居士). 서울 계동 출생.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다. 15세 무렵 학문적 성장을 거쳐 20세 무렵 효명세자와 교유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활동 및 업적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 ·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뜬 뒤 윤종의(尹宗儀) · 남병철(南秉哲) 등 당대의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에 나선 뒤 병조정랑 · 용감현령 · 부안현감(1850) · 사헌부장령(1851) · 동부승지(1854) · 곡산부사(1858)를 거쳐, 1860년(철종 11) 약 6개월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 조선 후기 이래 봉건적 모순의 실상과 그 아래서 신음하는 농민의 처지를 체험하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 도승지에 이어 사헌부대사헌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 ·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 · 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1866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중 그 해 7월 셔먼호사건을 겪었다. 이어 다시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대제학 시절인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 다시 중국을 다녀오면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청국의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귀국 후 형조판서 · 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74년 사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하고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그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의 문호개방 주장은 개항을 위한 내부적 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선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 뒤 한직인 수원유수로 있다가 1876년 죽었다.
문집에 《환재집》《환재수계》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출처: 종로구청/역사와 인물)
생애
미국의 선교사 · 외교관,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출신 .1881년 오하이오웨슬리언 대학 신학과를 거쳐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
활동 및 업적
1884년에 우리나라에 입국, 주한 미국공사관 의사로 선교사업 시작 1885년 의사와 교수로 일하다가 1887년 주미 전권공사의 고문으로 도미 , 청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국무성에 알림. 1890년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활동 시작, 1892년' The Korean Repository'를 간행. 1897년 주한 미국공사 겸 서울 주재총영사로서 전등, 전차 등의 설치를 위한 권리를 미국에게 넘겨줌. (출처: 종로구청/역사와 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1885년(고종 22)에 미국인 H. N. 알렌에 의해 세워졌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의사였던 알렌이 1884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미국공사관의 의사로 있던 중 우정국사건에서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게 되고 그후 청나라 병사들을 치료하다가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되었다. 그 후 그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5년 2월 재동(현 헌법재판소)에 세운 것이 광혜원이다. 광혜원은 왕실전용목적이었는데, 이를 일반인에게도 혜택을 주자는 취지로 1885년 3월 12일 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제중원은 개설 이후 환자수가 계속 늘자 1887년 장소를 넓혀 한성 남부 동현(銅峴; 지금의 을지로)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908년 4월 1일 관립한성고등여학교로 개교(종로구 도렴동) 이후 1910년 8월에 목조 2층 건물을 지어 재동(현 헌법재판소)으로 이전하였고, 1911년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22년 4월에 2층 벽돌 건물로 교사를 신축하면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1938년 경기공립고등여학교로, 1945년 정동으로 이전 후 1947년 경기공립여자중학교(6년제)로 개칭, 1951년 경기여자중학교(3년제)와 경기여자고등학교(3년제)로 개편된 후 1971년 경기여자중학교는 폐교되었고, 경기여자고등학교는 1988년 강남구 개포동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1941년 4월 2일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경성제3공립고등여학교로 설립 인가 후 개교, 1945년 광복 후 서울제3공립고등여학교, 1947년 서울제3공립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변경, 1949년 재동(현 헌법재판소)으로 이전해서 창덕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1년 창덕여자중·고등학교로 개편된 후, 1989년 송파구 방이동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재동 백송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7m, 뿌리부분 둘레 3.82m이다. 다른 백송에 비해 큰 편이며, 줄기가 아랫부분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줄기를 지탱하기 위한 받침대가 세워져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좋은 편이다.
재동 백송 주변 터는 예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 교정이었으나,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위치하고 있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